'태양의 후예' 조엘진과 한국 스포츠의 DNA 다양화 [유병철의 스포츠 렉시오]더팩트 기사제공: 2025-08-13 00:06:04

육상 남자 단거리는 서아프리카계 선수들의 우세가 확연하다. 지난해 파리 올림픽 육상 남자 100m 결승에서 미국의 노아 라일스(왼쪽)가 1위로 골인하고 있는 장면. 라일스는 9초784의 기록으로 9초789의 키셰인 톰프슨(자메이카)에 0.005초 앞서며 20년 만에 미국에 금메달을 안겼다./AP.뉴시스

[더팩트 l 유병철 전문기자]

# 스포츠에서의 유전자결정론

환경결정론의 대척점에 위치한 유전자결정론은 스포츠에서 아주 강력합니다. 단체 구기종목과 달리, 개인의 신체능력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육상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현장 지도자와 스포츠과학자들의 연구를 종합하면 대체로 7대3 정도로 유전자가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육상은 미국식 영어로 트랙 앤 필드(Track and Field)라고 하는데, 달리기를 의미하는 트랙에서는 아프리카계(이하 흑인) 선수가, 투척과 도약의 필드에서는 유럽계 백인들이 장악하고 있죠. 트랙도 단거리는 서아프리카계가, 장거리는 동북아프리카계가 강력합니다. 같은 흑인이라도 근유질의 스프린터와 키가 작고 마른 케냐의 마라토너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참고로 우사인 볼트로 상징되는 육상 단거리의 강국 자메이카도 유전학적으로 서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입니다.

# DNA가 지배하는 육상 단거리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육상도 장거리보다는 단거리에서 유전의 파워가 더 강력합니다. 마라톤은 한때 일본이 세계 정상권을 호령했고, 한국도 손기정, 황영조, 이봉주 등 최고의 선수들을 배출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단거리를 보면, 110m 허들을 제패한 중국의 류샹(42)처럼 아주 드문 예외(돌연변이)가 있지만 아시아계 선수가 세계 정상을 차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사실 류상의 종목도 ‘허들넘기’처럼 기술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그래서 아시아권, 특히 일찌감치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내건 일본은 적극적인 귀화정책은 물론, 다양한 방식으로 DNA 다양화를 추구했습니다.

지난해 일본 도쿄에서 한국의 장미란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무로후시 고지 일본 스포츠청장(오른쪽). 그는 일본-루마니아 혼혈이다. / 문화체육관광부 제공

# 무로후시의 종자개량론

극단적인 예가 무로후시의 '종자개량론'입니다. 무로후시 시게노부(80)는 육상 해머던지기에서 아시안게임 5연패(1970~1986년)를 달성했죠. 하지만 세계무대에서는 결선 진출이 버거웠습니다. 타고난 신체의 한계에 절망한 그는 2세에 모든 걸 걸었습니다. 루마니아 여자 창던지기 대표 선수와 결혼해 아들과 딸을 낳았습니다(이후 이혼을 해 ‘정략결혼’이라는 말도 나왔다). 자녀에게는 걸음마를 할 때부터 해머와 창을 가지고 놀게 하는 등 환경적 요인도 최대치로 끌어올렸습니다. 그 아들이 2004 아테네올림픽 남자 해머던지기 금메달리스트인 무로후시 고지(51)입니다. 지금도 일본의 스포츠청장, 피트니스 전문가로 왕성하게 활동 중입니다. 창던지기를 한 딸 유카도 오빠만큼은 아니지만 일본 대표를 지냈습니다. 이 정도는 아니만 한국도 케냐 출신의 마라토너 오주한을 귀화시키는 등 DNA 확대를 노려왔습니다.

'한국이 육상 단거리에서 우승하다니!' 지난 7월 27일(한국시각) '2025 독일 라인-루르 세계대학경기대회(유니버시아드)' 육상 남자 400m 계주에서 38초50의 기록으로 우승한 한국팀. / 대한육상연맹

# '태양의 후예' 조엘진의 등장

최근 한 동영상이 화제가 됐습니다. 지난 7월 27일(한국시간) '2025 독일 라인-루르 세계대학경기대회(구 유니버시아드)' 육상 남자 400m 계주에서 한국이 38초50의 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하는 장면이죠. 한국이 육상 단거리에서 세계 종합대회 우승을 차지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근육질의 흑인 스프린터를 제치고 한국선수들이 우승했으니 이 익숙치 않은 장면에 큰 환호가 터진 것입니다. 그런데 4명의 한국 계주팀에 앳된 아프리카계 선수가 한 명 있었습니다. 2번 주자인 나마디 조엘 진(19 예천군청)입니다.

지난 5월 구미 아시아육상선수권 남자 100m에서 역주하고 있는 조엘진. 나이지리아 다문화가정 출신으로 한국 단거리의 희망으로 평가받고 있다. /뉴시스

# 서아프리카계 한국인

성이 나마디이고, 이름이 조엘 진이지만 통상 ‘조엘진’ 혹은 ‘조엘'로 불리는 그는 2006년 멀리뛰기 선수 출신인 나이지리아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 출생으로 피부만 까말 뿐이지 완벽한 한국인입니다. 어린 시절 TV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아역으로도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100m 최고기록이 10초30으로 이미 역대 한국 고등부 최고기록을 경신했습니다. 향후 한국기록(10초07, 김국영)은 물론, 한국선수로는 최초로 10초벽을 허물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죠. 기술적으로 보면 스타트가 느린 단점이 있지만 서아프리카계 유전자를 받은 것 그대로 긴 다리와 강력한 파워존(허벅지-골반)을 바탕으로 폭발적인 스피드를 갖췄습니다.

2016년 인기리에 방영된 TV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출연한 꼬마 조엘진. '염소소년'이라는 애칭이 붙기도 했다. / KBS 화연 캡처

# 다문화사회 뜻밖의 선물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합계출산율 0.7명의 한국에게 이제 다문화사회는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OECD 기준으로 체류 외국인이 전체인구의 5% 이상이 되면 다문화사회가 되는데 한국은 2024년 말 4.89%(250만7584명)로 그 목전에 있습니다. 또 체류 외국인이 늘면 자연적으로 국제결혼이 늘고, 조엘진과 같은 다양한 유전자를 가진 한국인도 증가합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24년 다문화가정(부모 중 한 명 이상이 외국계)의 초중고 자녀는 약 48만 1140명으로 전체 514만 4200명의 3.8%입니다. 다문화 자녀는 초등학생이 절반 가까이 될 정도로 어릴수록 그 수가 많습니다. 빠른 속도로 늘고 있는 것이죠. 각종 K컬처 열풍 때문인지 기존의 중국, 베트남, 일본, 미국 등을 넘어 유럽, 서아시아, 아프리카 등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50년 전 무로후시의 노력’이 사회 변화와 함께 이제는 우리 주변에 차고 넘치게 된 것입니다. 남은 것은 이들이 잘 성장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특히 스포츠에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