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뮤지컬 '어쩌면…'의 기적 ①]브로드웨이 성공 키워드 '소재·창작·서울'아시아경제 기사제공: 2025-06-09 13:17:57

2016년 12월 300석 규모의 소극장, 대학로 DCF 대명문화공장 라이프웨이홀(현 예스24 스테이지 2관)에서 첫 무대를 선보인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한국 뮤지컬 역사를 새로 썼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9일(한국시간) 미국 뉴욕 라디오 시티 뮤직홀에서 열린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극본상, 음악상 등 주요 부문을 휩쓸며 6관왕에 올랐다.
최다 수상을 기록하며 올해 토니상 시상식의 주인공이 됐다.
이로써 지난해 '위대한 개츠비'가 의상 디자인상을 받은 데 이어 한국은 2년 연속 토니상 수상작을 배출했다.
다만 '위대한 개츠비'가 미국 소설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인 반면 '어쩌면 해피엔딩'은 순수 창작 뮤지컬인데다 주요 부문에서 수상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대학로 소극장 뮤지컬이 세계 뮤지컬 시장의 중심에 우뚝 선 셈이다.

기적을 이룬 '어쩌면 해피엔딩'이 뮤지컬의 본고장 브로드웨이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요인은 크게 소재, 창작, 서울의 세 가지 키워드로 요약된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인간을 돕는 '헬퍼봇'이라는 로봇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뮤지컬이다.
두 주인공 헬퍼봇의 이름은 '올리버'와 '클레어'. 이들은 과거 인간인 주인의 사랑을 받았지만 구형 모델이 되면서 주인으로부터 버림받는다.
올리버와 클레어는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과정을 겪으며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싹틔운다.
로봇을 앞세웠지만 사랑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감정을 주제를 다루는 로맨스물인 셈이다.

최승연 뮤지컬 평론가는 "브로드웨이에서는 로봇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작품이 거의 없다"며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소재가 신선해 관객의 주목을 끌었다"고 설명했다.

지혜원 경희대 문화예술경영학과장도 "이렇게 작은 규모의 작품이 브로드웨이의 주목을 받으며 토니상을 받는 경우는 흔치 않다"며 "주인공이 로봇이지만 보편타당하게 수용될 수 있는 주제로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고 했다.

인간 못지않은 감정을 지닌 로봇 간의 사랑을 다루면서 로봇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일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도 던진다.
인간과 로봇 간의 교감은 인공지능(AI)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동시대적 문제이기도 하다.

원종원 순천향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요즈음 AI에 대한 관심이 워낙 높아지고 있어 로봇의 사랑 이야기가 호기심을 자극하는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독창성(originality)을 지닌 순수 창작물이라는 점도 '어쩌면 해피엔딩'의 인기 요인이다.

원종원 교수는 "이번 토니상에서 '어쩌면 해피엔딩'과 함께 작품상 후보에 오른 작품 중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같은 경우에는 영화와 대중음악이 이미 큰 인기를 누린 작품"이라며 "공연계에서는 독창성이 있는 창작물보다 관객에게 익숙하고 잘 알려진 내용을 변주하는 성격의 작품들이 많은데 '어쩌면 해피엔딩'은 이야기 자체가 독창성이 있어 매력적인데다 완성도도 굉장히 높다"고 평했다.

라이선스 작품 못지않게 창작 작품의 비중이 높다는 점은 한국 뮤지컬 시장의 특성이기도 하다.

원 교수는 "일본도 라이선스 작품이 시장을 이끌어가는 동인으로 작용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라이선스 작품 못지않게 젊은 창작자들의 작품이 각광받는다"며 "이러한 점이 한국 뮤지컬의 경쟁력과 한국의 문화적인 힘을 만들어내고 토니상이라는 미국의 최고 권위의 시상식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게 되는 배경이 됐다"고 설명했다.

최승연 평론가는 "브로드웨이는 제작비가 워낙 많이 들기 때문에 검증된 지식재산권(IP) 작품을 각색하는 사례가 많다"고 설명했다.

최 평론가는 '어쩌면 해피엔딩'의 경우 브로드웨이에서는 이례적으로 관객들이 입소문을 내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고 했다.
창작 작품이다 보니 내용을 모르는 대중을 위해 공연을 본 관객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작품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는 것이다.

최 평론가는 "브로드웨이에서는 뮤지컬 입장권 가격이 워낙 비싸 우리나라보다 뮤지컬 관객층 연령대가 높고, 관광객 관람도 많아 입소문을 통해 작품이 알려지는 사례가 흔치 않다"며 "'어쩌면 해피엔딩'의 팬들은 작품에서 '반딧불이(firefly)'가 중요한 소재로 활용되는 점에 착안해 자신들을 '파이어플라이어'라 칭하며 작품을 홍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작품의 배경이 서울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흥행 요인으로 꼽힌다.
영화 '기생충', 방탄소년단(BTS) 등을 통해 한국 문화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이 높아졌고 작품에서 묘사되는 서울이나 제주의 모습도 흥미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원종원 교수는 "최근 들어 K팝이나 한국 영화에서 서울이 미래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며 "작품의 배경이 가까운 미래의 서울이라는 공간이 이러한 흐름에 딱 맞아떨어진다"고 설명했다.

최승연 평론가는 "브로드웨이는 다양성을 무척 중요시한다"며 "아시아, 한국 작품이기 때문에 다양성을 충족시키는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최 평론가는 음악도 무시할 수 없는 흥행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브로드웨이 공연에서 재즈 넘버가 보강됐다"며 "브랜틀리라는 인물이 재즈 넘버를 프랭크 시나트라처럼 크루닝 창법을 사용해 부르는데 굉장히 미국적"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