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힌 일부 북한군 병사들이 본국 송환을 거부하고 한국행을 희망하면서, 그 가능성이 새로운 관심사로 떠올랐다.
사실 세계사 속에는 이와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다.
1950년대 한국전쟁 당시에도 본국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이 있었고,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휴전 이후 또 다른 형태의 이념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런 갈등 속에서도 끝까지 '중재'의 본질에 천착하며 포로들의 권리를 비추어 본 군인이 있었다.
1953년 한국전쟁 휴전 이후 판문점 인근 장단벌에서 결성된 중립국송환위원회(NNSC)의 의장을 맡았던 인도군 장성 K. S. 티마야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티마야 의장은 180일 동안 양측에서 송환을 거부한 포로 2만30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득 작전을 펼쳤다.
'힌드 나가르: 장단벌 중립국송환위원회의 설득작전 180일'은 그 과정에서의 그의 고뇌와 숙고를 담은 회고록이다.
제네바협정에 따르면 포로들은 자국으로 송환돼야 했지만, 유엔 측은 전례 없는 규모와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공산군 측과 협의 끝에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포로들의 자유의사를 다시 확인하기로 합의했다.
위원회는 인도를 비롯해 유엔 측의 스위스·스웨덴, 공산권의 체코·폴란드 등 총 5개국 대표로 구성됐다.
형식상 인도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격렬한 이념 대립의 현장이었다.
위원회 활동에는 각국 요원과 군사 관리자 등 10여 개국에서 파견된 약 3만명의 국제 인력이 참여했으며, 장단벌 일대는 말 그대로 이데올로기 전쟁터가 됐다.
이 가운데 티마야 의장은 '타협', '합의', '협치' 같은 추상적 개념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에 필요한 조건과 과정을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는 군인이라기보다는 실천적 사회학자에 가까운 모습으로 회고록 곳곳에 등장한다.
그는 양측이 포로 수를 놓고 이념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티마야 의장은 "옳고 그름을 차치하고서, 당시 상황과 감정들을 볼 때 양측의 적대적 대립을 피할 수 없었다"며 "우리가 양측의 도덕적, 법적 문제에 대해 심판자 역할을 한다면 갈등을 계속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하고 끈기 있게 중립을 지키며 양측이 스스로 해결책을 착질 기대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양 진영 모두 이미 정해놓은 해답을 고수하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티마야 의장은 위원회의 존속과 양측의 협상 지속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는 교전국들이 이미 전쟁에 지쳐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현대 이데올로기 전쟁은 폭력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애쓰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질질 끌게 된다"며 "이 포화점에 다다랐을 때 교전국들은 이데올로기적 원칙은 타협하지 않더라도, 폭력 재개를 피하기 위해 어느 정도까진 대화할 준비를 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이후 수개월 동안 티마야 의장은 지난한 중재 작업을 이어갔다.
양 진영뿐 아니라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 자체도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다.
그는 포로들이 송환을 거부하게 된 이유를 깊이 탐구했다.
포로 수는 양 진영에게 이념적 우위의 '전리품'이었고, 자신들의 체제가 더 우월하다는 증거로 활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티마야 의장은 포로들을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대했다.
그들의 교육 수준, 처한 현실, 가능한 선택지까지 고려하며 끊임없이 대화했다.
무장한 사령관이라기보다는 시대를 고민하는 위정자의 모습이었다.
그의 고뇌와 중재에 대한 신념은 오늘날의 국제 갈등 상황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을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중재 작전은 성공보다는 실패에 가까웠다.
송환 거부 포로 2만3000여 명 중 위원회의 설득을 받은 이들은 3500명에 불과했고, 그 가운데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마음을 바꾼 이는 단 150명뿐이었다.
결국 송환을 끝내 거부하고 제3국인 인도를 선택한 88명은 티마야 의장이 인도 해군 함정에 태워 귀환시켰다.
그럼에도 이 사례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을 무력 충돌 없이 중재한 유일한 역사적 사례로 평가된다.
더 나아가 당시 인도 수상 자와할랄 네루의 '중립주의'가 1954년 인도차이나전쟁 중재로 이어졌고, 이는 훗날 인도의 비동맹 정책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이 책의 번역자인 라윤도 건양대 명예교수는 "이 회고록은 북측 포로와 남측 포로, 다른 중립국 송환위원국들과의 이해관계를 드라마틱하게 서술하며 양측의 맹목적 대립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며 "한국 전쟁사에서 잃어버린 송환거부 포로 설득작전 및 절차에 대한 복원, 한국전쟁 해석의 3자적 시각, 네루 중립주의의 태동 등 세계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힌드 나가르 장단벌 중립국환송위원회의 설득작전 180일 | K. S. 티마야 지음 | 라윤도 옮김 | 선인 | 444쪽 | 3만5000원
이민우 기자 letzwi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